유대인, 단성론자, 이슬람을 마치 독벌레 취급을 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예수의 운동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상한선이 예수까지다. 이를 일찍이 터득한 바울 선생은 “예수의 장성한 분량까지”를 목표하는 신앙인생을 계획했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속죄와 구원을 받은 인생의 격(格) 또한 한 마디로 “예수까지”다. 더도 덜도 말고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인간들이 잔꾀를 부리기 시작하여, 감히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라는 언행은 ‘참람죄’라고 했다. 예수  죽일 때 유대인들이 써먹었던 방법을 동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참람죄’를 무서워한다. 마치 ‘반역죄’를 두려워하던 왕조시대처럼. 단 한마디 변명을 하지 못하고 물러서야 하는 참람죄 앞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나 그 따위는 속임수다. 그 증거로 바울 선생의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까지”가 신앙목표였으며 “너희는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까지 하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흉내나 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마치 예수가 하시듯이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지금 우리들 중에 계신다면 기독교 사람들이 유대교를 학대하듯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단성론(기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숙아 단계의 기독교인들을 저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라비아의 무함마드 종교에 대해서도 원수로 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것이다”가 아니라 단호하게 말해서 예수는 오늘의 기독교 사람들처럼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처럼 유대인이나 이슬람을 사촌 수준은 유지하면서 세계사를 도모해 나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들소리”의 지향점이요 목적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유대인, 단성론자, 이슬람을 마치 독벌레 취급을 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예수의 운동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코로나19’를 대하는 한국교회의 초라한 모습을 보라! 초기에 ‘들소리’는 한국교회가 질병본부의 동반기관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앞장서서 방역에 나서는 자세를 취했다면 정부가 “방역 정치”를 할 수 있는 길은 차단하고, 우리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기독교(타종교도 동반하면 좋다)가 지자체와 협력하고 질병본부(정은경 본부장)의 보완, 협력기관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뒤에 앉아서, 응달에 숨어서 정부 비판이나 하는 따위는 예수 장성한 분량의 그리스도인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한국교회는 그리고 우리는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오늘의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온라인 예배” 드리라 한다고 종교탄압이라고 한다. 아니다. 온-오프라인방식은 좋다. 온라인은 영으로 예배, 오프라인은 영육간 예배다. 모든 현실 상황은 교회의 능력과 권위 안에서 가능하다. 하루속히 무능, 비겁함에서 벗어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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