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그 주변 사람들-1

떡덩이를 찾아다니기에 바쁜 예수 주변의 사람들. 오늘은 어떠한가. 사진은 초대교회 박해를 피해 사막 한가운데 동굴 속에서 신앙을 지킨 흔적이 있는 모습.
떡덩이를 찾아다니기에 바쁜 예수 주변의 사람들. 오늘은 어떠한가. 사진은 초대교회 박해를 피해 사막 한가운데 동굴 속에서 신앙을 지킨 흔적이 있는 모습.

디베랴 호수 건너편, 자칫 목자 잃은 양 떼들 처지가 될까 두려웠다. 예수는 그들을 불러 모아서 사막길 고달픔을 달래 던 중 끼니가 찾아왔다. 하루이면 서너 번씩 찾아오는 배고픔인지 아픈 건지 모를 지경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가죽옷으로 아랫배를 둘둘 감고 허리를 졸라매기도 했고, 딱한 이들은 주변에서 납작한 돌들을 주어서 가지고 다니다가 오후 2~3시경, 더는 견딜 수 없을 때는 허리춤에 질러 넣어야만 허리를 펼 수도 있는 배고픔이요 가난이다. 어찌 그 사정을 예수가 모르랴.

(목자 잃은 양 떼들이여~) 들릴 듯 말 듯한 예수의 입가의 들썩거림을 바라보는 세배대의 아들 중 하나인 요한은 예수의 시선에 집중했다. 예수는 유대광야의 구름 따라 흐르는 무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하늘 조각, 구름들이 지중해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을 보는 듯이 느껴졌다. 저 분은 시인이니까. 사람의 아우성보다는 하늘 구름들의 조화에 더 관심을 가지시더라.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다고 서로 붙잡고 소리치며 감격할 때는 언제였나? 그런데, 또 내게 구함이 있다. 지금 저희가 내게 구하는 것이 무엇일까. 병에서 고침 받았으면 일상생활이 모두 가능할 터, 아직도 도움이 더 필요한가. 몸 성하면 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지, 몸 만들어 주니까 밥까지 내 놓으라는 것일까. 모를 일, 인생은 참 모를 일이 많은가 보구나.

“산에 오르사.” 모처럼 제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 줄까 했는데 또 방해꾼들 인가. 그래 내가 생각을 바꾸자.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섞어 볼까? 유월절이니 이스라엘 내 백성에게 유월절 떡으로 일상의 떡까지 대신 해 볼까. 유월절 떡이란 절박한 시간의 음식이다. 음식이 아니라 예절이고 신앙 고백이다. 긴박한 시간, 저주와 구원의 갈림길, 심판과 생명의 갈림길에서 화급하게 선택을 강요받는 시간의 식탁이다.

내 백성들에게 유월절 식탁을 마련하리라. 조금은 심술궂은 모습으로 먼저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가 그 동안 빈들에서 저들 길 잃은 자들이 무엇인가, 를 찾고 있는 모습을 보았지. 광야 여행길에서 먼저 필요한 것은 먹거리가 되겠으나 저들 무리 중에는 조금은 낯설어 보이는 이들이 있다.

“마침 유월절”이라 했으니 격식을 찾아 보고자 함이 있었다. 예수께서 계산 빠른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구하면 이들을 먹일 수 있을까? 돈이 있다고 떡을 사 올수 있지는 않다. 시몬 베드로의 형제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예수께 보냄 받던 날 세배대의 아들 요한과 함께 나사렛 사람이 된 안드레가 돈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고 돈이 있다한들 빈들에서 장정만 5천여 명이 되는 군중을 먹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떡, 한 순간 안드레의 이마를 치고 가는 생각하나가 있다. 어린아이가 허리춤에 간직한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둘, 안드레는 이 내용을 예수께 넌지시 말했다.

예수는 이어서 군중을 자리에 정돈시키고, 먹을 만큼 받게 하셨으나, 반드시 남는 것을 주목하였다. 먹을 만큼, 오늘 여기서 먹을 만큼이 너희가 받을 은총이다. 내일을 위한 축적은 생각하지 말거라. 먹고 남긴 것이 열두 광주리다. 왜 광야의 순례자들이 남은 떡 욕심이 나지 않았을까.

더 이상은 탐욕이다. 예수는 저들을 경계했다. 이미 세속적 풍습으로 뒤집어져버린 유월절을 함께 할 형편이 아니었다. 제자들과의 거리도 필요했다. 어느 누구를 마음 놓고 믿을 수 있지가 않았다. 빈들의 순례자들, 저들은 아브라함이나 모세의 백성들이다. 이 광야를 거닐면서 하나님에게 배움을 익혀가는 히브리인들이다. 따르는 제자들은 물론 예수 자신마저도 히브리인이다. 

그러나 예수가 준 떡을 조심스럽게 먹어 준 광야의 5천 장정들, 예수가 앞세워 가게 한 가버나움 가는 제자들, 제자들은 예수가 광야의 백성들은 물론, 명색이 제자들인 저들에게도 거리를 두는 의미를 지금쯤은 깨달아야 하는데….

밤이 지나고, 그 다음 날 광야의 히브리들이 배불리 먹여주던 예수가 그들 곁에서 사라진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찌해야 할꼬! 밥줄을 놓쳤네. 살 길을 깜박했네. 우리가 어제 너무 흥분했을까. 왜, 우리가 예수를 잃어버렸나?

광야의 무리들 중 선발대가 예수를 찾는 소동을 벌인다. 요란스럽다. 어제 제자들과 배에 오르지 않았던 사실도 확인했다. 그럼 어디로 갔나? 하늘을 우러러 축복기도(축사)하니 그 어느 순간 줄 맞춰 기다리던 빈들의 방랑자들 앞에 넉넉하게 먹을 만큼의 음식과 고기를 주시던 꿈같은 어제의 일을 거듭 떠올려 보았다. 예수의 떡 먹던 디베랴 호숫가는 물론, 가버나움 뱃길도 빈들의 순례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몇 번씩 거듭해서 확인했을 것이다.

예수는 도무지 보이지 않고 제자들도 없었다. 빈들의 유월절 순례자들, 모세의 제자들이 그냥 물러설 수는 없다. 끝내 예수를 만났다. 가버나움에서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허겁지겁,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광야의 모세 제자들의 형세로 보니 그들의 전의가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혁명군들처럼 긴장감으로 가득하고, 그들의 눈길이 지나치게 탐욕스러워 졌다. 디베랴 호수 들판에서 줄 맞추어 앉아서 하늘의 떡을 기다리던 날의 모습이 아니라 다시는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긴장감이 그들의 주변에서 충분히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향하여, 랍비여! 어디에 계셨다가 지금 우리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시는 겁니까? 하면서 앙탈을 부리는 자식들이 부모 앞에서 칭얼거리는 듯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그런데 반갑고 기쁜 빈들의 순례자들에게 마치 면박을 주듯이 예수의 반응은 싸늘했다. 

“당신들이 나를 찾아, 찾느라고 애썼다고…?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내게서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 떡 먹고 배불러서이지 않은가?”

당신들이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러서다(요 6 : 26~). 기가 막힌 말씀이다. 우리네 말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했는데 듣기에 따라서 참으로 민망한 말이다. 웃는 얼굴에 침이 아니라 크게 망신을 주는 격이 되었다. 평소 예수는 인애롭고 자비로운 분이시다. 어찌 그가 몸부림치듯이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달려온 아브라함의 자녀들인데 그들에게 추호도 섭섭한 말을 하실 예수님이 아니다.

그런데, 표적이 아니라 떡을 찾는 자들이라고 쏘아 붙이심은 어인 일인가? 놀라운 사건이다. 전후 사정 간에 어떤 충격이 있었을까? 아니면 예수께서 심적 변화를 받을 만큼의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알 수가 없다. 기록상으로는 그렇다.

목자 없는 양 떼들, 정처 없는 뜨내기 유랑자들이라고 함부로 말해 버리기에는 조심스럽다. 저들 어느 하나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 자손이 아니거나 모세의 광야 40여년 훈련을 받지 않는 인물들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예수는 누구보다 더 잘 아시고, 또 조금은 그들 신분을 잘 모른다 해도 함부로 말을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실 분이 아니시다.

예수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

이야기는 비약을 한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마라. 했을 때 광야 사람들은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렇군! 선지자의 심정으로 볼 때 밥그릇이나 챙기려고 기를 쓰는 인간들의 모습이 하찮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드디어 예수의 생각 가까이 다가왔다. 예수가 그 자신을 하나님이 오늘 유월절 절기 가까운 때에 준비하신 양식으로 자기 자신의 인격을 내세운 것으로까지 생각 빠른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쉽게 분위기가 진정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은 썩는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않는 양식이라 했고,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일이라 하여 모세와 예수 사이의 갈등이 형성되고 있음을 광야의 순례자들은 느끼고 있었다. 

충돌이었다. 하나님의 주신 떡, 그것은 우리 조상 모세가 광야에서 날마다 주어서 먹게 하였던 만나와 다를 바가 있느냐? 아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0~).

돌이키기 어려운 갈등 단계로 진입한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4 ~).

대화가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듣기 싫은 사람들과 들려주고 싶은 사람 사이의 갈등일까. 접점이 쉽지 않다. 떡을 찾아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모세의 떡(만나)과 예수의 떡(진리의 표현법)사이의 혼돈인가? 쉬운 대화를 어렵게 듣고자 하여 어려운가, 쉽지 않은 말을 쉽게 하려다가 혼선을 빚은 것인가?

이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난처한 처지가 된 광야의 순례자들 모습이다. 이야기는 더욱 비약을 한다. 자기가 하늘에서 온 떡이라, 표현하는 예수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길 잃은 순례자들. 41절에 이르러서는 진리를 말하려는 분위기를 떠나 버렸다. 사실, 하룻길 헛돌면서 예수 찾아 허덕이던 때부터 빈들의 순례자들은 격식을 잃었다. 예수가 하신 말씀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6장 26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유대인들이 놓쳐버린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 먹고 배불러서다…. 이 정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예수를 상대할 수 있다. 최소한 진리를 향하여 예수를 향해 가는 사람들은 그 분의 말솜씨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허우적거리지 말거라. 시장거리에서 싼 것 한 사발 얻어먹는 심정으로 예수께 덤벼들다가는 개망신 당할 수 있다. 이 시간 이후, 예수와 빈들의 순례자들 최소한 유월절 절기의 순례자들 치고는 수준이 조금은 떨어진다 해야 하는가.

예수 찾아서 발품 파는 사람들아, 떡 한 덩이가 목표이거든 다른 길 찾아보시게 예수의 떡은 그의 살 그의 피를 함께 나눔까지라고 하시는 데 어떤가, 한 번 더 용기를 내 보겠나.

조효근 목사/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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